[VOM 컬처] 북 리뷰-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을 읽고서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을 읽고서

 

조선에서 막 건너온 이주민이 러시아어를 몰라 항만 회사의 잡역부로 일을 하고도 임금을 떼이기 일쑤라는 소문을 듣고 이주민의 까막눈을 깨우쳐주기 위함이었다.” (37p)

김노예 딸 수라가 파란(폴란드) 총각에게 시집을 갔다는 소문은 당시 조선인 사회에서 이상한 경탄과 불안을 일으켰다.”(83p)

그들은 차르 러시아와 카렌스끼 임시정부 시대에 아무런 권리도 없던 한인 여성이 러시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과 소비에트 기관의 실력자로 피선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들도 러시아인과 동일한 자유와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세상은 오직 소비에트뿐이라고 믿었다.”(310p)

 알렉산드라는 이들을 주축으로 ‘외국인노동자협의회’를 출범시켰다.”(354p)

이 책의 소제목은 ‘역사가 지운 한인 최초 여성 사회주의자 일대기’이다. 저자 정철훈은 공산당이라면 치를 떠는 남한 사회에서 전혀 언급될 수 없었던 한 여성운동가에 대해 썼다. 일종의 평전인 샘이다.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대한민국에서 과거 정권이라면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불온서적으로 저자를 남영동으로 끌고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이념의 장벽에 가려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역사가 이어져 왔다. 특히 여성의 역사는 더욱 과거 속에서 불러내는 일이 쉽지 않다. 그나마 우리가 조금은 민주주의적인 사회를 이루어내고, 말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살게 되어서야 객관적인 사실로서 언급되는 세상이 된 것이고, 한 개인 여성의 굴곡진 삶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혁명의 주체이자 조직의 리더이고 한 여성이면서 엄마이고 아내이며 연인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이 이주인권운동을 하는 나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식민지시대에 민족해방을 위해 분투하던 한 여성이 이주노동자가 된 조선인과 러시아어를 모르는 중국인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노동자의 권리와 평등한 대우를 위해 통역자이자 운동가로서 전면적으로 나섰다는 점이다. 더구나 해방 전 이주노동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러시아에서 조선인 여성이 이주노동자로 살아가는 같은 민족 출신의 사람들을 위해 투쟁의 길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습은 내가 아는 이주여성활동가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현재 이주노동자를 위해 통역과 상담을 하면서 문제해결을 위해 현장을 누비는 이주여성활동가들 말이다.

더구나 폴란드인과의 국제결혼을 통해 러시아에서 살아가면서 아이까지 낳고도 활발하게 활동한 모습은 결혼이주여성으로 와서 사회 곳곳에서 통역과 상담 그리고 지원사업을 하면서 헌신하는 많은 이주여성활동가들과 오버랩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과 다르게 한국사회에서 결혼이주여성들의 리더십은 좀처럼 인정받기가 쉽지 않았고, 같은 일을 하고도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해 논란이 되기도 한다. 물론 러시아는 그녀의 사후에 신념을 배반하고 한인들을 강제이주 시키는 만행을 저지르며 인종차별을 했지만, 그녀가 죽음을 일찍 맞기 전 볼세비키 혁명 당시 그녀는 인정받는 리더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책 속에는 남성들이 제법 등장하지만 그 남성들의 리더는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이었다. 총살 당하기 전 죽음마저도 당당하게 맞이하려 했던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쓰고 싶어한 이야기였음을 저자는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이 책은 사회주의 운동가의 발굴차원이 아니라, 여성 활동가이자 이주민이고, 통역자이자 상담가인 우리 안의 이주여성에 대한 존경심을 일깨운다.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이제 막 노동상담 통역을 시작한 캄보디아 출신의 결혼이주여성인 혜나 활동가와 이미 오랫동안 활동해오면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상담하고 문제해결하고, 기자회견과 집회 현장에서 서슴없이 발언해 온 <이주민센터 동행>의 원옥금 대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의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2009년 ‘성·인종차별반대공동행동’에서 처음 만났을 때 보다 훨씬 단단해진 베트남 출신의 한가은 사무국장, 그리고 스리랑카에서 이주노동자로 왔다가 결혼을 통해 정착하면서 연예인급 인지도를 가지고 이주여성들의 경제적 자립과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일하는 <톡투미>의 이레샤 대표, 자조모임을 훌륭한 단체로 키워 이주관련 활동 전반을 아우르며 다문화가족들의 권익을 위해 애쓰고 있는 <생각나무BB센터>의 안순화 대표, 보령에서 살면서 <이주여성유권자연맹>의 리더이자 보령의 이주여성의 권리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중국동포 출신의 최미자 대표 등 많은 이주여성들이 떠오른다. 여기에 열거하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쓰다 보면 끝없이 나열해야 해서 나랑 최근까지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들일뿐이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이렇듯 디아스포라된 자신의 위치에서 같은 출신국을 넘어서 이주사회 전반의 이슈에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 이주민인권을 위해 투쟁하며 활동하는 이주여성들이 있다. 나는 이 책이 그러한 활동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국제결혼 한 여성들을 팔려온 사람들로 치부하거나 수동적인 피해자로 여기거나 미숙한 사람들로 여기는 사람들이 변화하기를 바란다. 이 책은 그러한 변화를 위한 인식의 충격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아쉬운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인종차별적인 시선이 내재화 된 문장들이다.

조선인이 소를 부리는 솜씨와 달구지를 관리하는 꼼꼼함에는 중국인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근면성과 정교함이 깃들어 있다.”(28p)

무질서는 블라디보스토크가 여러 민족의 특성을 혼합해 발전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척도였다. 수라는 거리를 오가는 여러 민족의 얼굴에서 문화차이를 읽어내곤 했다. 그럴 때 무질서 속에서 여러 인종의 특성을 발견하는 비범한 관찰자가 따로 없었다.”(29p)

마르크의 사랑은 어딘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그의 파란 눈이 그걸 말하고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투명한 파랑”(74p)

시대가 바뀐 오늘날 이런 식의 민족 우월주의나 문화적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인종적 구분과 불신은 불편한 묘사임이 틀림없다. 더구나 평전이 소설처럼 느껴지는 이 부분은 그저 저자의 생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과거에 만난 적 없는 후대의 사람이 자신의 관점에서 쓸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쓰지 않아도 되는 문장으로 읽는 이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한 여성을 민족의 우상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그녀의 활동이 지니는 의미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내게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은 차별 없는 평등세상을 위해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고 최선을 다해 목숨까지도 내놓은 당당한 운동가 선배이다.

정혜실 (이주민방송MWTV 월례세미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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