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M 컬쳐 영화 리뷰] 영화 ‘파힘’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들! 체류자격이란 무엇인가? 프랑스로 이주해 온 방글라데시 청소년의 체스 승리가 가져다 준 특별 체류자격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파힘영화 포스터

2019년 피에르프랑스아 마르탱라발 감독작품으로 아흐메드 아사드와 제라르 드파르디외 등이 출연한 영화 ‘파힘’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방글라데시에서 체스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던 주인공 파힘은 아빠의 급작스러운 이주결정으로 프랑스를 향해 떠난다. 언어도 돈도 준비되지 못한 이주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노숙의 생활로 접어들 즈음 난민을 지원하는 단체의 도움으로 난민신청을 하게 되면서 머물 곳과 교육을 지원받는다. 체스 그랜드 마스터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아빠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던 아들은 지원센터 덕에 체스교실에서 체스를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어린 아들 파힘은 현실을 알게 된다. 난민신청을 통해 정착 기회를 얻을 수 있을 만한 증명서류도 없고, 프랑스어를 자신만큼 빠르게 숙달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살아 남기 위해 필요한 일자리를 구하기는커녕 추방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힘은 체스대회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고, 끝내는 전국대회 우승컵을 거머쥔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로 마침 체스교실의 마틸드 선생이 마침 프랑스 총리와 연결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파힘의 현실이 공유되면서 ‘국가에 이익이 되는 존재’로서 인정받고 파힘과 온 가족이 체류자격을 받는다는 정말 동화 같은 현실이야기이다. 영화 속에서의 해피 엔딩은 나와 같은 이주인권 활동가에게는 좀 불편한 결말이다. 결국 체류자격이란 특히 이와 같은 특별한 체류자격의 부여는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자전적인 이야기를 책으로 낸 후 텔레비전인터뷰를 본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감동적인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프랑스인 감독이 또는 프랑스 국민에게 감동스러운 이 실화는 현실적으로 다른 이주민들이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처럼 보인다. 현실에서 종종 일어날 수 있는 합법화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행운은 아니다. 한국에서 미등록체류아동의 합법화는 공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비공식적인 사례는 간혹 일어난다. 그 모든 일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어찌 보면 이 영화에서 보듯이 프랑스 국민 중 누군가 이 아이의 체류자격을 강력히 요구하며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등록체류자격의 청소년이 총리 같은 정치인에 의해 공식적으로 합법적인 체류자격을 가진 청소년으로 바뀌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여러 가진 질문들이 떠오른다. 그 첫 번째는 난민이란 누구인가? 난민의 자격은 어떻게 부여되는가? 라는 것이다. 법이 정한 난민의 범주 안에 들어가야만 하는 정의로는 충족되지 않는 파힘과 그의 아버지의 자격미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법이 정한 난민의 기준에 따르지 않으면 이들은 가짜 난민인 것일까? 우리는 쉽게 시리아나 예멘 사태를 통해 전쟁난민을 인지하고 있지만, 법규정상 전쟁난민은 난민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난민 인정률이 3% 또는 0.8%이라는 비율은 신청자 전체 비율에서 나온 이야기다. 심사가 까다로운 것으로 간단히 판단할 수 없는 정의 자체의 문제와 심사과정이라고 하는 제도 또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 그리고 난민에 대한 여론이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하지만 경제적 난민처럼 이주의 목적이 박해를 피하는 행위가 아닌 생존의 문제인 먹고 사는 문제가 사실상 난민 신청의 이유가 될 때 이들은 난민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나마 전쟁난민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모국의 상황이 도저히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피난민으로 인도적 체류지위에 머물 뿐이다.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보호받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외국인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하기 전에 거주한 국가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무국적자인 외국인을 말합니다.

(난민을 위한 매뉴얼 A to Z)

두 번째 통역이란 무엇일까? 통역과정에서 통역자가 거짓말을 하면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 아니 처벌은커녕 통역의 오류를 발견조차 못하는 불운은 오로지 난민이 감당해야 할 몫인가 하는 문제이다. 파힘은 프랑스어가 어느 정도 늘었을 때 통역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절차에서부터 이미 오류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통역의 거짓으로 인해 불이익이 돌아가는 난민들은 어떻게 구제받을 수 있을까? 한국도 최근에 이와 비슷한 사건을 겪었다. 하지만 법무부로부터 어떠한 공식적인 사과도 있지 않았다. 운이 좋은 몇몇 사람들은 법정 투쟁을 통해 난민 인정자가 되기도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통역의 오류를 수정해도 난민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면 추방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난민 신청이 아니어도 이주민으로서 체류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합법적인 체류자격조차 신청하거나 연장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통역이 필요하지만, 모든 이주민들이 통역지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주노동자였던 한 캄보디아 여성이 유학생으로 한국에 재입국하여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서 체류자격 신청이나 연장에 동행한 적이 있다. 동행한 당일 경험한 그 경악할만한 무례와 반말을 함께 들은 나는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빠른 한국어로 오가는 고성과 막무가내 안내는 도대체 한국어를 모르는 이주민들에게는 상황 자체가 공포스럽다고 느껴질 듯 하다. 그때 전이된 분노는 가끔 생각날 때 마다 참을 수 없는 욕지기를 나오게 만든다. 통역이란 단순한 언어번역이 아니라 하나의 권리가 된다. 한 사람의 체류자격이나 신변의 일들이 통역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는 상황이 온다. 그것이 체류자격을 심사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난민이 아니라면 다른 이주민들은 통역의 지원을 받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관련 단체들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아직 이주한 나라의 언어를 발화할 수 없는 이주민은 그 자체로 자신의 권리를 제한당한다. 혼인신고와 이혼, 사별, 출생신고, 교육, 입학, 취업, 건강 등 모든 일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미등록체류자라면 그 권리의 제한이 가중되는 것이다. 파힘의 경험은 실제 난민 심사 과정에서 반복되는 한국의 현실과 닮아 있던 것이다. 다만 영화에서는 그 잘못 또한 이주민들 사이의 윤리적인 문제로 돌려버리지만 말이다.

세 번째 질문은 체류자격은 보상인가? 아니면 시혜차원인가? 아니면 제한된 특권인가? 하는 점이다. 체스에서의 승리 그리고 얼마 전 뉴스에 보도되었던 건물에 매달린 아이를 구조한 일처럼 프랑스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존재로서 증명되어야 하는 문제일까? 이주노동자에게 주어지는 E-9은 한국경제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주어진다. 하지만 이주노동자의 기여는 단기적인 것으로 환산되고, 그 체류자격은 410개월로 주어진다. 그것은 그들의 기여가 영주권을 얻을 만큼의 체류자격은 아니라는 것일까? 그런데 결혼이민자에게 주어지는 체류자격 F-6-1은 한국인과 결혼해야만 주어지는 체류자격이다. 결혼의 진정성과 자녀양육이 이들의 체류기한을 연장하는 주요 요인이다. 한국의 노총각을 장가 보내고, 저출산의 문제를 해결하는 이성애중심의 가족을 국제결혼을 통해 이루어내어 국가에 헌신하게한다는 의미에서 부여되는 체류자격이다. 이렇게 결혼이민자 여성은 출산의 도구가 되고, 재생산을 위한 수단이 된다. 결혼의 지속가능성과 진정성을 증명하는 근거로서 출산은 기여점수로 평가된다. 사회에서 정작 다문화가정 자녀라는 이유로 온전한 시민권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제도들을 유지한 채 한국인의 핏줄을 이어내고 있다는 그 사실에 부여된 이주민사이의 특권으로서 결혼과 출산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인 결혼이주민은 한국의 정상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구성원이지만, 정작 자신의 가족들인 부모나 형제자매 또는 친인척을 불러들이기 쉽지 않은 상황에 놓인다. 나갈 수는 있지만, 나의 핏줄을 불러들이는 일은 제한된 조건에서만 허락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이민자의 가족결합권이나 이주노동자의 가족결합권은 정책에서도 차등적으로 부여되고 차별적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나마 이들은 국적이 있거나 국적을 바꾸거나 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이주자들이다. 난민은 떠나 버린 나라에서 와서 영주할 수 있을 지 모르는 상태에서 낳은 자녀들이 무국적자가 되는 상황이 된다. 나라를 떠나 나라가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파힘은 체스라는 실력으로 우수인재임을 증명하고 국익에 도움이 되므로 가족까지 결합하게 되는 행운을 얻는다. 보편적인 권리가 아닌 특별한 권리가 되어버린 체류자격이다. 파힘처럼 그 어떤 재능도 특출 나지 않은 아이들은 그러한 기회조차 없다는 것이다. 몇 년 전 국가대표가 될 아이들이 뽑히는 국비지원 스포츠 선수에 발탁된 몽골이주배경청소년이 결국 다니던 학교에서 나와야 했다. 그는 미등록체류자이기 때문에 아직 증명되지 않은 실력으로 그 학교를 다닐 수도 없고, 귀화자가 아니기에 국가 대표를 꿈꿀 수도 없는 것이다. 고려인 4세인 한 학생이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축구 선수가 되고 싶고 한국을 대표하는 축국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다른 단체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다문화가정자녀 축구 지원 프로그램이 생겼기 때문이다. 축구 선수가 되려던 아들을 키워본 나는 그것이 얼마나 막연한 프로그램이고 비현실적인 꿈인지 아이에게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 어리니까. 영화에서 체스선생은 학교에 소속된 학생이라면 누구나 체스대회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주장하고 싶다. 비록 미등록이주배경청소년이라도 한국의 청소년이라면 누구든 누리는 보편적 아동청소년의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국적과 상관없이 자신의 삶이 아동으로서 최우선 되는 사회에 살아야 한다고.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파힘의 아버지가 문화차이로 인해 시간을 쉽게 어기고, 무능력한 밥벌이와 빨리 늘지 않는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불쌍한 이주민으로 그려져 속상했다. 나는 주변의 이주민들이 하루 하루를 너무 열심히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고 흥분하다가, 문득 나 또한 우리 사회의 속도와 시간 그리고 활동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주민들을 무능력하거나 게으른 사람으로 평가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본다. 우리의 시선이란 어떤 시선인 걸까? 특별하지 않은 보편적 권리로서 우리가 공존해야 할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 정혜실(이주민방송MW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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