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설립 후 15년 간 이주여성의 인권보장운동과 역량강화를 위해 헌신하고 지난 1월에 퇴임한 前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대표 한국염 목사. 그는 2월에 그동안의 이주여성인권운동을 사례로 정리한 책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다》를 출판했다. 책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한국염 목사가 공동대표로 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을 찾았다.
이 땅에서 가장 고통받는 민중은 누구인가,
끝없이 묻고 답하고 행동한 한국염 목사
이주여성과 함께 한 15년의 활동, 책으로 펴낸 한국염 목사 인터뷰
이 땅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은
민중이었고, 이주노동자였고, 결혼이주여성이었다.
숲씨(이하 숲)> 책 서두에 독일의 한 모임에 참가했다가 자신도 모르게 발현된 작은 몸짓에서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인종차별’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 엄청 울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스스로의 모순을 바라보고 거기서 출발할 수 있는 힘이 운동의 진정성을 담보하게 하는 근원적 힘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염 목사님을 믿고 따르며 함께 해올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이 땅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은 이주노동자라는 답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갖고 오랜기간 활동을 지속해올 수 있으셨나요.
한국염(이하 한)> 하루아침에 확신이 생긴 건 아니죠. 먼저 유년시절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저부터가 이북에서 피난을 온, 이주민 출신이에요. 6.25 때 아버지는 길에서 돌아가시고 어머니하고 둘만 남아서 고생을 엄청 했었거든. 그래서 가난이나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처음부터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어요.
그 다음에 신학교 학부 시절의 경험도 영향이 있었죠. 신학교 첫 학기에 흑인들의 해방을 이야기하는 신학을 배울 기회가 있었거든요. 이후에도 남미의 해방신학 등을 꾸준히 배울 수 있었고.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그런 경험들을 할 수 있었던 건 저한테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이후에 80년 광주 사건과 전태일 사건 이후로 민중신학이라는게 등장했지요. 그런 흐름 속에서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또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될 사람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질문이 있어 왔어요. 독일 가기 전에도 이 땅에서 가장 고통받는 민중이 누구냐는 질문을 던져 왔던 거예요.
이후에 독일에서는 책에서 썼던 것처럼 내 안의 인종차별을 직시하는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고요. 한국에 돌아와서 우리 남편(최정의팔 목사)하고 나하고 창신동에서 민중교회를 열었어요. 거기가 서울의 3대 빈민지역으로 알려져 있던 곳이었거든요. 거기 교인들이 주로 무학의 노동자들하고 전교조 선생님들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당시에는 전교조나 노동운동이 법적으로 많이 탄압을 받았으니까. 그분들이 다 교회로 왔죠.
그런데 90년도 즈음에 김영삼 정부와 함께 유사 민주주의가 들어오기 시작한 거죠. 그러면서 전교조도 합법화되니까 전교조하던 분들은 다 떠나가고, 정말 이름없는 민중들만 남은 거예요. 무학의 노동자들하고 같이. 교회에 중국 동포 노동자들도 몇 분이 나왔었는데. 이 분들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지더라구요.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이 누구냐는 질문을 다시 하게 된 거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주노동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고 있다는 대답을 듣게 된 거예요.
독일에서의 이야기를 조금 덧붙이자면, 저는 사실 가족을 먼저 돌려보내고 독일에서 여성신학으로 박사과정까지 하려는 생각이 있었어요. 나는 여성이라 장학금을 더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거든. 그런데 남편이 하는 얘기가, 사람이 마흔이 넘으면 삶을 실천해야 될 나이인데 뭘 또 새로 하려고 하느냐. 그 얘기를 들어보니까 일리가 있는 거죠.
제가 거기서 더 남아서 공부를 했다면 분명히 교수가 됐을 거예요. 우리 신학교에 여자 교수 자체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한국에서 저에게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을 가르치셨던 교수님들이, 물론 훌륭한 분들이셨지만 아무래도 교수다 보니까 민중처럼 살지는 못하셨거든요. 내가 교수가 된다면, 나도 그런 딜레마에 빠지게 되지는 않을까. 그런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공부를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민중교회를 열게 된 거죠.
숲> 나중에는 센터에서 ‘선교’라는 이름도 아예 빼버리셨다고 했는데, 기독교 목회자 신분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리실 수 있었나요?
한> 박노자씨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아시겠지만, 이주노동자 교육이나 프로그램은 주로 일요일에 하게 돼요. 게다가 이주노동자 쉼터가 교회하고 붙어 있으니까.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이주노동자 운동을 교회하고 같이 운영했었죠. 예배를 이주노동자들이 서로의 생각도 나누고 한국살이도 알게 하고 그런 기회로 삼으려고 한거예요.
그런 얘기는 했어요. 기도를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기도 대상이 ‘알라’도 될 수 있고 ‘부처님’도 될 수 있다. 여러분이 믿는 신을 찾아서 기도를 해라”. 그리고 찬송도 기독교 찬송이 아니라 “단결하라, 우리 모습 속에 신이 있다” 이런 운동에서 하는 노래를 가르치기도 하고. 그래도 일단은 예배라는 형식은 가져간 거예요.
그때 박노자씨가 쓰신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책을 접하게 됐는데, 거기에 보니까, 그분이 처음에 한국에 와서 어려우니까 선교단체에 간 거예요. 근데 또 하필이면 보니까 CCC라고 대학생 선교회인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보수적인 데를 갔더라고. 거기서는 러시아 백인 남성이 오니까 잘 해주면서 간증 비슷하게 시키고 내세운 거죠.
그런데 이 분이, 자기 인생에서 자기가 그 때처럼 비겁하게 느껴졌던 때가 없었다. 그런 걸 하지 말아야 했는데, 자기가 좀 쉽게 살려고 교회에서 주는 돈을 받으면서 ‘자기 철학을 편의에 의해서 접었다‘ 그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고. 그걸 읽으면서, 물론 정통 기독교 식의 예배는 아니더라도, 예배라는 형식 자체가 이주노동자들한테 폭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노동자 선교센터에서 선교라는 글자를 떼어버렸어요.
숲> 굉장한 결정이었네요. 이후에 후원에 어려움을 겪진 않으셨나요?
한> 후원은 뭐. 우리 교단 자체가, 소위 진보적인 교단이니까. 굉장히 작아요. 애초에 후원 액수가 크지는 않았던 거지. 그래도 나도 목사고 남편도 목사고 하니까 교단의 지원을 많이 받기는 했어요. 선교 글자를 뗄 떼도 뗀다고 광고하고 뗀 건 아니었으니까. 그 뒤로도 도움을 많이 받았죠. (웃음)
숲> 책에서 이주민 역량강화 운동을 ‘콩나물에 물주기’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저도 이주민단체에서 일을 하지만, 업무효율을 생각하다보면 선주민이 일을 주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해요.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한> 출판기념회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저는 당사자가 직접 하는 운동에 대한 문제의식은 항상 가지고 있었어요. 어렸을 때는 한국 최초의 여목사가 되겠다고 해서 신학교에 갔어요. 여성들이 능력이 없고 열심히 하지 않아서 목사가 되지 못하는 줄 알고 있었던 거지. 그런데 제가 교만했던 거예요. 막상 가보니까 가부장적 교회 시스템 내에서 여자가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아예 막혀 있던거지.
그 즈음부터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교회 여성운동에서 시작해서 다른 이슈들, 가족법 개정운동 같은 걸 할 때도 함께 하게 됐어요. 이런 활동을 하면서 누가 해주는 것보다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가장 힘이 있더라는 걸 체득한 거죠.
우리 센터의 가장 큰 목표도 그거였어요. 이주여성이 센터 대표가 되어서 다른 이주여성들을 지원할 수 있게 해주자. 체류권이라는 한계가 있으니까 처음에는 우리가 도와야 하는 측면이 있겠지만, 우리 국적을 얻는 여성들이 늘어나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겠어요?
1577-1366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편집자주: 2006년 여성가족부에서 이주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고 모국어로 상담받을 수 있는 긴급전화 1577-1366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에 위탁 설치했다. 2014년부터는 결혼이민자의 한국생활적응을 돕는 다누리콜센터와 통합되었다.)를 처음 만들 때에도, 정부가 그걸 잘 운영할 수가 없으니까 우리한테 위탁을 줬어요. 처음에 정부 측에서는 그 나라 언어를 하는 한국 사람들을 상담원으로 고용하는 걸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상담은 한국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아는 이주민 당사자가 해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주여성들에 대한 교육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1년은 교육을 받아야 한국어가 좀 되는데 1년은커녕 3개월쯤 지나면 취업한다고 다 나가버리는 거예요. 독일에서 보니까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그 사람들한테 용돈을 주더라고. 그래서 우리도, 교육 기간에 이 사람들한테 70%수준의 월급은 줘야 된다고 요구했죠.
이 얘기는 책에 자세히 쓰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실갱이가 오간 끝에 정부에서도 오케이를 하고 예산이 나왔어요. 어쨌든 그때는 역량강화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했다기 보니까 당장에 필요하니까 필요한 교육을 시킨다는 식으로 시작한 거예요. 이후에도 후속교육이 계속 이루어지다 보니까 어느 정도 역량강화라는 문제의식이 충족된 측면도 있는 듯 하고요.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진행했던 한국어교실. 다문화지원센터가 지금처럼 늘어나기 전에는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 흔치 않아 많은 결혼이주여성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사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제공영상 캡쳐)
결혼을 통한 이주가 아닌, 노동을 통한 이주가 늘어나야 한다.
숲> 운동을 하시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 그리고 보람있었던 점을 소개해주세요.
한> 어려웠던 점이라기보다는 가슴 아프고 충격을 받은 점인데요, 이건 우리 법인 본부 이야기는 아니고, 모 지부에서 지부대표랑 이주여성 상담원 사이에 갈등이 심해져서 그분들을 만난 일이 있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우리 대표가 잘못하긴 했어. 그런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이주민 여성이 뭐라고 했느냐면, “너희들도, 좋은 말로 하면, 우리 때문에 있을 수 있는 거 아니냐” 맞는 말이죠. 우리가 이주여성 때문에 존재하는 건 맞는데. “센터 활동가들이 자기네 덕분에 월급을 받는다” 그런 식으로 말을 해서요.
그때 가슴이 찡 울리더라고. “여러분이 문제제기 하는 부분도 맞고, 센터가 여러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맞다. 그런데 여기서 봉사하는 사람들 일반 회사에 가면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좋은 일 하겠다고 이러고 있는거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왔죠.
돌아오는 버스에서 자괴감이 드는 거예요. 사회주의권 나라에서는 NGO라는 개념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입장에서 보면 국가에서 이런 사업을 하는 건 줄 알고 우리 때문에 너희가 먹고 산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죠. 이주민 여성들 붙잡고 하나하나 우리는 봉사활동하는 거라는 설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람있었던 건, 지부가 하나씩 만들어지고, 이주여성들이 도움을 받아가고. 가끔은 이주여성들이 자립을 해서 쉼터의 운영위원이 되기도 하고. 이렇게 이주여성들이 실제로 주체로 서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보람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숲> 이주의 악순환의 근본 원인은 세계적인 양극화 때문지만 그런데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제도 내에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말씀도 어디선가 하셨었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들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한> 2006년에 인신매매성 이주에 관련된 아시아 전략회의라는 걸 한 적이 있어요. 우리나라에 국제결혼을 많이 오는 나라 활동가들하고 같이 한 회의였죠. 거기서 제가 제안을 했어요. “아시아 여성들이 중개업자의 알선에 의해서 결혼으로 이주하는 형태 말고,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로서 올 수 있는 길을 많이 열어줘야 한다. 그런 식으로 한국에 오게 되면, 한국 남자들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서로 아는 상태에서 사랑에 의해서 결혼을 할 수도 있을테고, 적응 문제도 많이 줄어들지 않겠느냐. 국제결혼에 의해서 생기는 문제가 많이 줄어들 수 있을거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고용허가제가 시행되면서 이주노동자 중에 여성들이 적어졌어요. 지금 농업이주노동자로 여성들이 들어오고는 있는데, 그건 정말 3D도 아니고, 아주 끔찍한 환경에서 일을 하게 돼요. 그런 방식 말고, 남성들이 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일을 할 수 있게 해야되지 않겠어요.
물론 한국의 상황이 바뀌기는 했죠. 봉제공장같은 경공업 공장들이 대부분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나, 심지어는 (지금은 중단된) 개성공단으로 옮겨갔으니까. 여성들이 일할 수 있는 산업 자체가 점점 위축되고 있고. 그래서 여성들의 일자리가 줄어든 것도 있죠. 하지만 그래도 이주여성들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아예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사실 이 문제는 통일 이후에도 제기될 쟁점이지요. 통일이 되면 북한에서도 여성들이 많이 이주해 올 수 있잖아요? 비슷하게 브로커들이 성행할 수도 있고. 어쨌든, 먼저 노동이주로 들어와서 한국인들 만나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냐 하는 건 지금도 제 소신이에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할만 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악순환도 줄어들 거고.
숲> 지금 고용허가제 시스템에서는 단기순환제도 때문에 오히려 그런 악순환이 늘어나고 있죠.
한> 사실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입장에서 봐도 숙련공들이 많이 생기는게 이익이에요. 그런데 송출국에서는 오히려 단기순환제도를 선호한다고 해요. 한국에서 노동자들이 어느 정도 기술을 배워오기도 하고,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자주 오는 쪽이 브로커 수익을 많이 남길 수 있으니까요.
숲> 정부에서 지원 사업이 늘어나면서 이주여성단체들도 많이 늘어났다고 하셨는데요. 부작용 같은 건 없을까요?
한> 이주여성단체들이 늘어났다가, 요즘에는 예산이 줄어드니까 다시 문을 닫는 데도 있어요. 지금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맹점은 뭐냐면, 시간이 지나면 이주여성이 그 일자리를 대체를 해야되는데, 이게 선주민 일자리대책이 되어가고 있는 거예요.
물론 거기서 이주민하고 일하면서 이주에 대한 이해가 생길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재밌는 건, 재밌는 건지 어이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설문조사를 해보면 이주민들하고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이주민에 대한 혐오감이 높다고 해요.
이주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없이 그런 사업을 하다 보니까 이주여성들에 대해서 나쁜 점을 오히려 더 많이 보게 되고. 이렇게 되다 보면 한국인들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실제로도 지역 다문화센터나 복지관 같은 데서 한국인들이 억울하다는 생각 갖고 사는 사람이 많아요. 이주여성들이 열심히 살지 않는 것 같아보이고.
그런데 한국에 오는 이주여성들은 대부분 10대~20대 초반 여성들이잖아요. 한국에서도 그 나이대 여성들이 열심히 살아봐야 얼마나 열심히 살겠어요. 그 시기의 욕구가 당연히 있는 건데. 그건 생각 못하고 한국에 시집 왔으니까 아내로서 역할을 해야한다고만 생각하는 거야. 물론 해야 할 일이 있기는 하겠지만, 나는 한국인들이 어린 아내를 얻었으면 그만큼 각오를 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숲> 이주민 역량강화뿐만이 아니라 선주민 활동가들의 인식개선 프로그램도 시급할 것 같아요.
한> 그렇죠. 그래서 우리 센터에서는 선주민, 이주민 활동가가 같이 하는 프로그램을 시도하고 있어요. 이주민 활동가, 선주민 활동가에게 각각 필요한 교육이 있는가 하면 둘이 이야기를 해 볼 기회도 필요한 거지. 서로간의 이해에 어느 정도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니까 오히려 서로 꾸준히 이야기를 해 봐야 되는거죠.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이주민 및 선주민 활동가들을 성장시키기 위한 다양한 역량강화 프로그램을 진행해오고 있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제공영상 캡쳐화면)
맨 밑에 사람이 잘 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돼요.
숲> 이제 다른 활동가가 보내주신 질문을 몇 가지 더 드리도록 할게요.
손건웅(이하 손)> 일터에서 이주노동자가 출산휴가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해 출산을 숨기면서 일을 한다고 하면, 한국인도 출산휴가를 못 보장받는데 배부른 소리를 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한테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요?
한> 왜들 자꾸 기준을 안 좋은 쪽에 놓고 싶어할까요. 한국 사람이 출산휴가를 보장받지 못하는 건 법에 어긋나는 거잖아요. 그런데 한국인도 그렇게 못하는데 너희가 그걸 왜 받냐.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거지. 다 같이 안좋게 살 수는 없잖아요.
일본 시민운동단체에서 쓰는 용어가 하나 있어요. 외국인이 살기 좋은 세상은 일본인에게도 살기 좋은 세상이다. 이주노동에게 산전·산후 휴가가 되는 세상이라면 선주민은 어떤 대우를 받겠어요. 언제나 인권이란 건, 맨 밑에 사람이 잘 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장애인을 위해서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놓으면, 비장애인들 – 임신하거나 다친 사람들, 노인들도 그 시설을 이용할 수 있잖아요.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해요.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이주여성 활동가 양성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제공영상 캡쳐화면)
손> 이주노동의 피해사례를 이야기하면 위장결혼으로 인한 피해 사례도 있지 않냐는 반박이 들어오고는 하는데요, 위장결혼으로 인한 한국인 피해자가 실제로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그걸 막기 위한 제도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한> 책에 위장결혼에 관한 세 가지 케이스가 나오지요. 하나는, 이주여성들이 자기가 위장결혼인지도 모르고 브로커한테 속아서 오는 사람도 있어요. 브로커들이 한국에 와서 3개월 있으면 외국인 등록증이 나오는데, 그 뒤로는 맘대로 나가서 취업을 해도 된다. 이 말을 믿고 오는 거죠. 이건 결과적으로는 위장결혼이야. 그런데 이 사람들이 속이려고 한 건 아니잖아요?
두 번째 케이스는, 위장결혼인 줄 알고 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한국에 들어오고 싶어서, 중개업하고 짜고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는 건 사실이죠. 이건 문제가 좀 있는 상황이고.
세 번째 케이스는, 한국에 악질 브로커들이 한국의 신용불량자, 노숙자들한테 돈을 주고 위장으로 국제결혼을 시키는 거지. 그 여성들이 돈을 내고 들어오는 거예요. 절반은 브로커가 갖고 절반은 그 사람들한테 주고. 근데 1년 뒤에 연장을 해야 되는데, 그 남자가 계속 있으면 연장이 되지만 없어지면 잡혀가는거고. 이 케이스는 성매매하고 연결이 되기도 해요. 결혼을 시켜줄 것처럼 한국에 데려와서는 성매매를 시키는 거지.
그러니까, 위장결혼을 해서라도 자기 집을 나설 수밖에 없는 아시아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물론 그 여성들이 잘 한 건 아니니까. 저희도 지원하기가 곤란한 지점들이 있기는 하죠. 한쪽에 피해자가 생긴 상황에서 무조건 편을 들 수는 없으니까. 이주여성이 억울하면 이주여성 편을 들어야겠지만, 반대도 가능하지 않겠어요? 마지막으로 위장결혼 실태는, 정부도 통계가 없어요. 우리도 알기가 힘든 부분이기는 하네요.
손> 이주여성들의 강점을 한국사회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한> 이주여성의 강점이라고 하면서 이주여성들에게 특화된 일자리를 만드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있지요. 그런데, 강점 이야기를 하면 힘들어지는 지점들이 있어요. 다양성이나 그 사회의 문화, 언어. 이런 것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런데 그 사람들한테 맞는 일자리를 찾아주자고 하면, 요즘은 저학력 이주여성들이 많은데. 그러면 저학력 입장에 맞게 넌 3D업종에서 일해라. 이렇게 할 수는 없잖아요?
저는, 이주여성들에게서 특별한 강점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인정을 하고, 그 사람이 원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게 맞다고 봐요. 작위적으로 강점을 찾아서 일을 시키자고 하는 건, 현재 사회에서는 아직 이야기하기가 곤란하지 않을까요.
손> 다른 이주민들은 다 받아도 이슬람권 국가에서 온 이주민은 인정할 수 없다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한> 보수기독교단체에서 많이 하는 이야기죠. 그분들은 다른 문화 사람들을 대하는 일차적 목적이 ‘개종’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불교나 그런 문화권이 있으니까 거부감이 좀 적은데, 무슬림에 대해서는 그런 게 없으니까. 개종이 잘 안 될 것 같은가 보지. 이런 거부감은 시간이 좀 필요한 문제일지도 몰랴요.
그런데 무슨 종교이냐만 가지고 사람을 단정하는, 예를 들어 무슬림이 다 폭력적이라고 해버리는 식은 곤란하죠.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폭력적이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걸 무슬림이라는 특정 종교 때문에 그런 거다? 무슬림 종교와 근본주의는 구별을 해야죠.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도 꽤 무서워요.
물론 저도 무슬림 내에서 성차별적인 요소나 가부장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런 것까지 인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는 해요. 하지만 이건 그냥 일반론적인 이야기니까요. 불교나 유교,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성차별적, 가부장적 요소도 마찬가지로 비판받아야 할테고.
숲>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선생님의 활동 덕분에 지금까지 이주민여성인권 운동이 제도적인 면모를 많이 갖출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앞으로 다음 세대에서는 이주민 운동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한>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 당사자운동이 성장하다 보니까 이분들이 자기, 혹은 단체의 단기적인 이해관계를 따라서 움직이는 경향이 생기더라구요. 박근혜 지지 선언에 이주여성에 100명이나 가기도 하고.
이거 자체를 초기단계에서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것들이 제 입장에서 보면 곤란하죠. 자칫 이주여성들이 정치 영역에서 이용당할 수 있는 소지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정치권에서 이주여성들을 유권자, 주체로 인정하는 거하고 이주여성들이 기득권층에 편승하려고 하는 건 분명 다른 거잖아요? 정말 주체로 서는 게 어떤 건지. 이주여성들의 역량강화에 진짜 도움이 되는 게 어떤 건지 생각을 좀 더 해줬으면 좋겠고요.
제가 이주여성 교육을 하면서 걸었던 기치가 ‘변방에서 주체로’였어요. 그런데 이게 몇 사람의 이주민 여성을 센터로 편입시키려는걸 의미하는 건 아니었거든요. 그런다고 해서 전체 이주여성들의 역할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요.
어려운 이야기기는 합니다만, 이주여성들이 민중으로서의 자기를 인식하고, 민중으로서 우리나라의 중심이 되면 좋지 않을까요? 이런 게 궁극적으로 이주여성운동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봐요. 이걸 위해서는 선주민 운동 또한 이주민여성들의 주체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할테구요. 이주민여성들의 삶이 좋아지면 자신들도 저절로 나아진다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숲> 네, 좋은 말씀 많이 나누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2001년에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를 설립하고 15년간 헌신해 온 한국염 목사가 이주여성인권운동 15년의 이야기를 사례를 중심으로 기록한 책 《우리 모두는 이방인이다》를 출간했다. 출판기념 북토크는 2월 24일 경동교회에서 열렸다. (영상·편집 : 황희천 기자)
인터뷰 | 숲씨, 손건웅 MWTV 기자 mwtvbae@gmail.com 정리 | 한건희 MWTV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