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 통신] 귀국하는 이주노동자를 따라서

 

만나고 친해지고 떠나고, 대부분 연락이 끊기고

나는 수원이주민센터에 2005년 2월 13일 처음 왔다. 그 당시 수원이주민센터의 이름은 ‘수원외국인노동자쉼터’였다. 나는 이 이름에서 ‘노동자’, ‘쉼터’ 이런 단어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외국인’이라는 단어의 신기함에 이끌렸다. 그냥 하루 자원봉사하러 갔는데, 헤어질 때 다들 다음 주에 보자고 인사하셔서, 또 그다음 주에 갔고, 또 다음 주에 보자기에, 또 그다음 주에 갔다. 그렇게 지금까지 왔다.

센터에서는 연간 300~400명의 이주민을 만난다. 나는 이주민들을 만나고, 친해진다. 그 후 몇 년이 지나면, 그들은 떠난다. 반복이다. 그리고 대부분 연락은 끊긴다. 이번에 처음으로 나는 귀국하는 노동자를 따라서, 그들의 나라에 다녀왔다.

매주 함께 밥 먹던 사람이 갑자기 보호소에 갇혔다

우리는 어떤 관계였을까?

특별히 이번에 떠나게 된 이유가 있었다. 이주민들과 길을 다니다 보면 ‘아는 사이에요? 어떤 관계에요?’라고 자주 질문을 듣게 된다. 우리는 어떤 관계일까? 오랫동안 센터에서 매주 만나고, 매주 함께 저녁을 먹던 스리랑카에서 오신이주노동자분이 갑자기 강제출국명령을 받고, 보호소에 갇혀버렸다. 비자도 있었다. 너무 허무했다. 처음에는 이 사실이 진실인가 했다. 다른 사람에게 내 목소리로 이 사실을 전달하는 동안 사실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3주간의 투쟁 끝에 소주 한 잔 하다

귀국하는 이주노동자를 따라 스리랑카로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허무한가, 헤어질 때 소주 한 잔 못하는, 악수도 못 하는, 안아 보지도 못하는, 공항에서 배웅조차 못하는 관계였다는 것이 너무 참을 수 없었다. 면회를 하러 가서 보호소의 면회신청서에 ‘관계’라는 칸을 마주했다. 예시에는 ‘사업주, 친구’가 적혀있었다. 나도 ‘친구’라고 썼다가 보호소 직원에게 계속되는 질문들을 들어야 했다. 무슨 센터 소속 아니시냐?, 어떻게 아는 관계이냐?, 어떤 친구냐? 등등. 우리가 진짜 어떤 관계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 이주노동자분은 3주간 보호소에서 견디고, 우린 밖에서 열심히 싸운 끝에 다시 비자를 받고 보호소를 나오게 되어 소주도 한 잔 하고 헤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뭔가 아쉬웠기 때문에 함께 가자고 제안을 하셨을 때 같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나라, 거대한 숲 

한국이었으면 공장과 아파트로 변했을 유적지

스리랑카는 한국의 2/3 정도 되는 크기로 한국보다 작지만, 스리랑카에 가면 거대한 숲, 사파리공원, 고래, 오래된 유적지, 절 등을 볼 수 있다. 스리랑카 여행지들은 입장료가 15,000원에서 45,000원까지 했었다. 물론 종종 무료인 곳도 있었지만, 국립공원이나 유적지 대부분이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만 했다. 처음에는 외국인이 한 명이 오면 얼마나 벗겨 먹으려고 이렇게 비싼가 싶을 정도였다. 부담이 갔다. 그러다가 같이 간 활동가가 한국이었으면 이 넓은 땅을 다 개발해서 공장과 아파트를 지어 돈을 벌었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보니 이 입장료는 정당한 값이었다.

한국에는 있고 스리랑카에는 없는 

걸인과 노숙인

이주노동자분이 한국에 계실 때 이야기하셨다. 왜 한국에는 쓰레기 줍는 노인이 많냐고, 스리랑카는 아무리 한국보다 돈이 없지만 그런 사람들이 없다고. 갔더니 실제로 없었다. 큰 도시 두 곳에서 총 3명의 구걸하는 사람을 보았다. 노숙인도 없었다. 왜 그럴까? 이들을 다 시설에 숨겨놓은 건지, 실제 없는 건지, 가족이나 마을공동체에서 이들을 보살피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마지막 날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여행 동안 운전을 못 하기 때문에 운전기사를 고용해서 함께 다녔다. 마지막 날 출국할 때 운전기사분이 바뀌셨는데, 원래 그분은 버스운전 기사였는데 교통사고가 나서 6개월간 병원에 계셨다고, 현재는 일을 못 하고 있다고 했다. 귀국하신 이주노동자분이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여행할 때부터 이 분을 고용했을 거라고 말했다. 한국에서였다면 제일 먼저 제외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교통사고로 병원에도 입원했었고, 일도 못하고 있으니 운전을 못 한지 꽤 지난 거 아닌가, 그렇지만 스리랑카 분들은 이 분을 고용해야 한다고 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무상교육 

스리랑카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무료로 교육이 이루어진다. 또한 1년에 한 번씩 학교에서 교복도 무료로 제공된다. 물론 대학 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만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기술을 배워서 일자리를 찾는다고 했다. 부러웠으며, 답답했다. 비싼 돈 주고 대학 가서 졸업해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이. 그러면서도 제조업, 농축산업 분야에 임금을 낮추기 위해 이주노동자를 수입하는 현실이. 수입해놓고, 일자리의 부족을 이주민의 탓으로 돌리는 현실이.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것

국경과 비자의 장벽은 너무 커

귀국하신 이주노동자분은 한국행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 열심히 돈만 벌어서 빨리 돌아가자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지내면서 2013년에 비자가 끝나 첫 번째로 귀국했을 때 너무 외로웠고, 다시 한국에 못 올 거라는 생각에 비행기 안에서 계속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어쨌든 다시 한국에 돌아와 1년만 돈을 벌어 돌아갈 생각이었던 것이, 2년이 되고, 3년이 되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보호소에 가면서 차라리 잘 되었다고, 한국에서의 인연을 정말 아쉽지 않게 끊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우리가 스리랑카로 함께 떠나면서 우리의 인연이 쉽게 끊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겠지만… 하하. 

이번에는 내가, 나와 함께 갔던 활동가들이 그랬다. 스리랑카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우리는 내내 울었다. 비행기가 생겨나고, 자유로운 무역경제가 활성화되었다지만, 돈이 있어도, 시간이 있어도, 국경과 비자가 엄청나게 큰 장벽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원하는 곳에 가고, 내가 원하는 곳에서 살고, 내가 원하는 사람과 만나는 일이 어찌나 어려운 일인지. 그것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국경이 얼마나 의미 없는 허상인지. 

 

이지연 | 수원이주민센터 이주노동자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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