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이란의 편지와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자각

 

송해성 감독의 2001년 작 <파이란>은 20세기 말에서 21세기를 넘어오면서 한국 사회가 ‘IMF 구제금융 사태라는 국가부도 상황을 겪은 후세계화라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사회 전체가 재정비되는 시점에 만들어졌다.    

영화는 서울 인근 항구도시 인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인천은 오래전부터 화교들이 차이나타운을 형성한 중국계 이주민의 집단 거주지가 있는 곳이며중국동포들이 한국을 오가는 창구이자중국동포들을 상대로 한 영세한 취업소개소와 결혼중개업소가 수두룩하고개발과 저개발이 뒤섞인 풍광 속에 서울 주변부의 변두리 정서가 배어있는 장소로 영화의 배경이 되기에 제격이다.

 

 

배 한 척 장만해 고향에 돌아가는 게 꿈인 동네 건달 강재

인천 뒷골목을 전전하는 삼류 건달 강재(최민식)는 공갈을 일삼고푼돈이라도 생기면 오락실에서 죽치면서 인형뽑기 게임 성공 여부에 일희일비하는 한심한 신세다배 한 척 장만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꿈인 강재는 90년대 후반부터 한국 대중영화의 주요 장르가 된 조폭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건달의 이미지 대신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불량배의 현실적 일상을 재현하는 인물이다.

강재와 같이 건달생활을 시작했던 친구 용식(손병호)은 어느새 조직의 보스가 되어 있지만강재는 그 밑에서 나이트클럽 삐끼 노릇이나 하며 건달입네 건들거리지만 새파란 후배들에게도 무시당하며 조직의 언저리에서 맴도는 인물이다.

위장결혼한 중국동포 처녀의 부고

어느 날강재는 용식과 술을 마시다가 용식이 영역 다툼을 벌이던 다른 조직의 일원을 우발적으로 살해하는 광경을 목격한다용식은 강재에게 자기 대신 감옥에 가준다면 그토록 소원하던 배를 사주겠다고 제안한다.

고민 끝에 그 제안을 받아들인 강재에게 갑작스러운 부고가 날아든다강재가 돈을 받고 서류상으로 위장결혼을 해주고는 잊고 지냈던 중국동포 처녀 파이란(장바이즈)이 부고의 주인공이다죽은 사람의 남편임을 확인하는 절차를 위해서그러니까 결혼 자체가 위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강재는 파이란에 대해 알아야 한다.

디아스포라 여성 이주노동자의 편지와 한국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자각

강재는 파이란의 가련한 처지를 통해 자신의 처지가 가련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파이란의 순수한 사랑에 비추어 자신의 순수함을 발견하려고 한다파이란이라는 디아스포라 여성 이주노동자를 통해 한국의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현실과 처지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이런 강재의 자각을 이끌어내는 것은 파이란의 편지다.

장바이즈가 연기하는 서툰 한국어 대사에 실린 파이란의 편지 내용은 그 편지를 쓰는 파이란의 안쓰러운 처지나 강재를 비롯한 한국 사회의 실상에 대해 선의만으로 해석하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동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삶

파이란의 이주생활은 인신매매의 전형적인 사례다직업소개소에 수수료 뜯기고중간 소개 단계에서 또 수수료 떼이고사진 한 장과 서류 하나로 위장 결혼해 준 강재에게도 사례비 건네고 남은 것은 자신의 몸 하나다그래서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저당 잡힌 파이란이 처음 보내진 곳은 술집이다자해를 해서 병을 가장하고서야 파이란은 술집에서 벗어나 바닷가 마을 세탁소에서 고되고 초라한 생활을 꾸리며 빚을 갚아 나간다자신의 노동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삶은 소외된 삶이고소외된 삶의 결과는 죽음이다일을 하면 할수록그래서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면 될수록 파이란은 죽어간다

세상을 날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

그런데도 파이란은 한국 사회에 감사하고 강재를 사랑한다고 말한다파이란의 편지는 강재에게 환대의 문제를그러므로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이런 질문을 경유한 강재의 자각은 세상은 날 삼류라 하고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는 영화 포스터의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이안  MWFF 이주민영화제 프로그래머

서울대학교에서 미학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상이론 및 영화를 전공했다.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사무국장 및 서울여성국제영화제, 세이브더칠드런 아동권리영화제 프로그래머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이주민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성공회대에 출강하며 각 매체에 영화 평론 및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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