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칼럼] 이주인권운동 27년, 이주민미디어 운동 16년

이주인권운동 27년, 이주민미디어 운동 16년

10일 오전 9시께 서울 영등포구 옛 영등포구청 근처 로터리 고가도로에서 중국동포 임호(38·흑룡강성 탕원현 탕왕조선족 홍기촌 거주)씨가 10m 아래 차도로 뛰어내려 그 자리에서 숨졌다. 숨진 임씨와 한국에 와 역시 공사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동생 종호(33)씨는 “형이 지난 92년 5월 29일 고국 친지방문 명목으로 관광비자를 얻어 입국한 뒤 공사장을 전전하며 2백만원을 모았으나 최근 불법체류 사실이 밝혀져 벌금 1백80만원을 문 뒤 우울증세를 보여왔다”고 말했다. 경찰조사 결과 숨진 임씨는 오는 23일 출국하기 위해 법무부 목동출입국관리소에 신고하러 갔다가 불법체류 사실이 적발됨에 따라 벌금을 낸 것을 밝혀졌다.

1993년 11월 11일자 <한겨레신문> 18면에 난 단신 기사이다. 임호씨는 자진신고를 위해 출입국사무소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모은 돈으로 고향에 돌아가 차를 사서 아내와 함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돈의 대부분을 벌금으로 내고는 속이 상해 한국에 온 이후 처음으로 친구를 만나 실컷 술을 마셨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주머니에선 8만 원짜리 배표와 현금 1만 원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보름 뒤인 26일 ‘외국인노동자피난처’, ‘희년선교회’ 등의 단체들이 ‘노예노동 금지하고 벌금법을 철폐하라!’는 피켓을 들고 서울 출입국관리사무소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였다. 한국 정부를 상대로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해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참여하여 벌인 첫 집회라고 알려진다.

그 이후로도 ‘우리도 피와 감정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산업재해보상을 요구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농성(1994년 1월), ‘빼앗긴 임금과 인권을 돌려달라’라는 구호를 외친 산업연수생들의 농성(1995년 1월), 장시간 노동과 노동환경에 저항하는 다국적 노동자들의 파업(2002년 1월)에 이르기까지 이주노동자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한 싸움을 이어갔다.

2003년 말은 이주노동자의 저항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고용허가제가 도입되기 전 정부가 30만 명에 달하는 국내 미등록 이주노동자 가운데 장기체류 중인 사람들을 모두 추방하겠다고 엄포하였고, 더 갈 곳도 없게 된 노동자들은 11월 15일 명동성당, 성공회대성당, 조선족교회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5천 명이 넘게 모여 농성을 벌였다. 정부의 노동이주·동포 정책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명동성당에 모인 노동자들은 가장 오랫동안 버티면서 이주노동자가 자유롭게 사업주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노동허가제’를 주장하였다.

명동성당 농성장의 노동자들은 1년이 넘게 싸움을 이어갔지만, 정부의 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지친 노동자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마붑 알엄씨는 그가 쓴 책 󰡔나는 지구인이다󰡕을 통해 당시의 기억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문이나 방송에 나온 우리 모습은 오갈 데 없어서 숨어 지내는 불쌍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 우리 마음에는 당당함이 있는 데 그걸 보여 주지 않았다. 고용허가제 반대나 노동3권 쟁취 같은 이주민의 목소리도 뉴스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 2004년 10월 혹은 11월쯤, 그러니까 농성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 우리들은 주로 언론에서 다루는 이주민 이야기에 대해서 비판을 했다. … 그런데 사실 이제는 만날 문제만 얘기하는 것에도 지쳐가고 있었다. … 그런 고민이 한창일 때 … 우리더러 RTV에서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어 보라고 제안했다. 우리로서는 조금 놀랐다. 우리는 언제나 인터뷰를 당하는 입장이었고, 우리의 얘기들은 결국 편집되거나 우리가 말한 의도와는 다른 내용으로 전달됐다. 우리 손으로 방송을 만든다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 나는 헤미니와 토라에게 시민방송과 관련된 일을 같이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2004년 12월 18일, 이들은 ‘이주노동자의 날’을 맞아 ‘백분토론’을 제작하여 시민방송 RTV를 통해 송출하였다. 마붑 알엄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를 다루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은 있지만 이주민이 사회를 보고, 이주민이 패널로 앉아 있는 프로그램은 처음이었다. 이주민들이 100퍼센트 만들어 낸 프로그램이 하나쯤 있다는 게 너무 대단하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대상화되는 게 아니라 주체가 되는 일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그날 ‘이주노동자방송국(MWTV)’이 설립되었다. 이들은 ‘이주노동자 세상’, ‘다국어 이주노동자 뉴스’를 제작하였고, 이 프로그램들은 케이블·위성방송 채널인 RTV를 통해 한국의 가정집으로 전달되기 시작하였다. 2006년부터는 ‘이주노동자영화제(MWFF)’를 개최하여 수많은 영화팬들이 이주민들이 만든 영화를 보러 오게 하였다. 2011년 ‘이주민방송국’, ‘이주민영화제’로 이름을 바꾸고 난 이후에도 뉴스와 영화제, 이주민 미디어교육은 계속되었다.

토론회를 가면 MWTV 스티커가 붙은 카메라가 설치된 삼각대를 항상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항상 끝까지 남아 참가자들을 인터뷰하였다. 집회에 가면 MWTV 스티커가 붙은 카메라를 든 활동가들이 항상 집회장 선두와 후미를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하면서 촬영하고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활동가분들은 항상 반갑게 인사해 주셨다. 매년 가을엔 영화관 입구에서 공짜 티켓을 받아 좋은 영화를 볼 수 있는 영화제가 열렸다. 학생들 여럿을 데리고 같이 영화를 보러 갔지만, 후원금은 영화 티켓 값에는 훨씬 못 미치는 금액밖에 내지 못해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SNS나 팟캐스트를 통한 방송을 딱히 자주 보거나 듣지는 않는 편이라 MWTV 라디오나 TV 방송을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었음을 솔직히 밝힌다. 하지만 영상자료나 사진, 상세한 기사가 필요할 땐 늘 MWTV 웹사이트를 찾아갔다.

2019년 6월에는 수백 명의 결혼이주여성이 익산시청과 국회 앞에 모여 시위를 하였다. 이주배경아동 비하 발언을 한 익산시장을 규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낸 것이었다. 2020년 4월에는 이주노동자, 결혼이주민, 난민, 중국동포 등 다양한 배경의 이주민이 한자리에 모여 기자회견을 하였다. 코로나19 재난지원금 정책에서 이주민을 배제하지 말라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였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들의 진정을 받아 권고를 제시하였고, 서울시는 그 권고를 수용하여 이주민 일부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하였다. 이제 이주인권운동은 다양한 주체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조직하여 다양한 주장을 담아내고 있다. 지난 27년 동안 여러 걸음 앞으로 나아간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제자리이거나 뒷걸음질 중인 부분도 많다. 2018년 5월에는 박해를 피해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을 순식간에 테러범, 성폭행범, 마약사범 몰아세우는 인종주의자들이 만연했다. 2018년 10월 한 이주노동자는 떨어진 풍등을 주워서 다시 날린 것 때문에 저유소 화재 사건의 책임을 다 뒤집어쓰고, 결국 2년 뒤 1,100만원 벌금형을 받았다. 2020년 7월 이주인권단체들의 조사에 따르면 전북 개야도에서 일하는 고용허가제 어업 이주노동자의 월평균 휴일은 0.1일이고 노동자 70%가 제때 임금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020년 12월 20일, 한파특보가 발효되고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내려간 날. 경기도 포천의 한 비닐하우스 숙소 안에서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 속헹씨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난방장치가 작동하지 않던 숙소에서는 3주 뒤 출국 예정인 캄보디아행 항공권 예약증이 남아 있었다.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속헹씨는 4년 10개월을 일하고, 잠시 귀국하였다가 ‘성실근로자’ 제도를 통해 다시 국내에 돌아와 일할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대책 없는 욕심일 수도 작은 소망일 수도 있겠지만, 지난 16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이주민방송’이 항상 이주인권운동 옆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글 | 김철효 (전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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