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토박이 제주 사람의 평화와 인권 운동: 예멘 난민들을 위해 입이 되다!

[2018년 제주 예멘 사태 이후의 이야기들 시리즈 마지막 네번째]

토박이 제주 사람의 평화와 인권 운동: 예멘 난민들을 위해 입이 되다!

2018년 대한민국은 광장이 뜨거웠다. 한쪽의 사람들은 “국민이 우선이다”라고 외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난민을 환영한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적인 갈등은 2018년 제주도에 도착한500명 가량의 예멘 난민들이 법무부 출입국에 의해 ‘출도 제한’이 되면서 불필요한 논란의 시작이 그 원인이 되었다. 이후 혐오세력들의 발언들과 행동들은 예멘 난민이 제주도라는 섬을 벗어나 소위 육지로 오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오직 5명만이 인도적 사유로 제한 해제를 받았으며, 나머지 492명은 출도제한이 되었다. 난민 심사 또한 대부분 인도적체류자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끝났고, 극히 소수의 예멘 난민이 난민 인정자가 되었다. 이후 2020년 현재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예멘 난민은 마치 잊혀진 존재 마냥 관심에서 멀어져 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지금 이주민방송MWTV의 웹진VOM이 새삼 이들의 삶이 궁금해진 건 왜일까? 그 네번째 이야기로 마무리 하려 한다. 제주 예멘 난민에 대한 혐오가 넘칠 때 오히려 이들을 위해 발벗고 나서서 활동하고 언론 대응으로 분주했던 제주 평화인권연구소 ‘왓’의 신강협 상임활동가의 이야기를 통해 알아보았다.


저의 역할은요

난민 관련해가지고 제가 불려가지고 어떻게 엮이게 된 건데, 그 후에 김상훈 사무국장님은 예멘 난민에 대한 긴급구호활동 그러니까 숙소라든지 의료지원 그 다음에 음식 물품지원 뭐 이런 것들을 주로 담당을 했었어요. 언론 대응 활동은 주로 제가 좀 많이 담당을 했었고, 그 다음에 난민들에 대한 정책 방향이라든지 실제적으로 체류 관련과 법적인 부분은 워낙 경험이 풍부하신 김성인 국장님이 계셔 가지고 그렇게 3명이서 처음에 비상체제처럼 그렇게 움직였어요. 나중에 예멘 난민 문제가 커지면서 제주난민인권을 위한 범도민위원회가 만들어졌어요. 그 때부터는 저의 역할은 난민사태 이후 상황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기거나 이슈가 생길 경우에는 제주평화인권연구소 ‘왓’이 인권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었어요. 제가 이주 인권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정책적인 이슈에 대한 아젠다를 던지는 역할을 했어요. 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김상훈국장님이 모아서 주셨어요. 그러니까 그 이후에 난민에 대한 긴급구호 활동이나 의료지원을 나오미센터의 수녀님이나 천주교 교인들이 계속하게 돼요. 숙소도 지원 하게 되죠. 그런 와중에 여전히 차별과 배제의 문제가 생기니까,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저한테 전화하시면 이런 문제들을 알리죠. 천주교에서는 이런 문제제기를 하기에 쉽지 않은 상황들도 있고 하니까 저한테 정보도 알려주시는 거죠. 제가 가지고 있는 소스들이 거의 대부분은 김상훈 사무국장님이 주신 거라고 보시면 돼요.

제주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외면하지 않는다는 정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아니 같이 사는 거죠. 아니 원래도 지난 번에도 왔을 때 말씀 드렸지만, 제가 난민지원 활동하고 막 할 때 어르신들이 그런 이야기 했다고 했잖아요. “거기에도 구제해야 할 사람은 구제 해야지 뭐.” 구제해야 할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구제를 해줘야 된다, 도와줘야 한다는 거거든요. 제주사람들이 가진 기본적인 마인드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외면하지 않는다는 정서는 있었던 것 같아요. 뭐 다른 데서도 충분히 찾아 볼 수 있는 의식 이기는 하지만요. 그런 의식들이 강할 수 도 있겠다 했고. 그런 점에서 난민들과 같이 살아가는 거에 대해서 크게 불안해 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외부 선동에 의해서 좀 불안감이 한 순간에 증폭되었다가 그 증폭된 불안감이 사실은 실체가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사람들이 예멘 난민 대하는 것에 대해서 크게 편해진 것 같아요. 사람들이 보게 되는 거죠. 저 사람도 예멘에서 왔나 하고요. 옛날에는 외국인이라고 하면 다 미국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나라에서 왔지? 생각보다 다른 게 없을 거 같다 라는 인식을 하게 되는 거고. 실제로 난민들 하고 오래 부딪히면서 살게 되잖아요. 여기 지금 현재 남아 있는 사람이 칠십에서 팔 십 여명 정도 인데 어쨌든 이 사람들은 여기 이 식당처럼 정착을 하게 되죠. 그러면 여기에 한국사람도 오고 지역 사람도 오고 하면서 만날 거잖아요. 해보니까 또 별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뭐 그게 큰일은 아니었구나 하고, 그 정도까지는 인식이 된 거 같아요. 인권의식 변화까지는 아니지만,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같이 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수준으로는 변한 거죠.

인종차별과 혐오의 발언들을 조금 걸러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는 거는 누구나 다 반대하는 거예요. 그리고 백인들이 흑인들 인종차별하거나 이런 거에 대해서는 뭐 아무튼 사람들이 반대도 하고 그 클리어 한 거는 누구나 쉽게 저항을 하더라구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가 인종차별을 한다고 잘 생각을 안하는 거 같아요. 하지만 실제로 보면, 인권운동을 통해 차별과 혐오에 대한 공부를 조금씩 하면서 그것을 구체화 시켜 나가 보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흔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 많은 일들이 조심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구나 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런 측면에서 사람들이 그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집단적인 자의식을 통해 가지고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는 인종차별과 혐오의 발언들을 조금 걸러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최소한 그것에 대해서는 알려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포인트로서 저는 차별금지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봐요. 그러니까 차별금지법을 통해서 과연 얼마나 많이 차별과 혐오를 없앨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저는 일단 부차적인 문제이고,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아 이런 것도 차별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알려내는 것이 필요하죠. 우리가 행하는 것들이 차별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 인권활동가 신강협님은 제주 예멘 난민에 대한 혐오발언이 넘치고 전국적인 사회문제로 떠올랐을 때, 제주 4.3 사건을 겪었던 외할아버지 이야기가 생각나서 가슴이 울컥했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몇 년 전 전국인권활동가대회가 제주에서 열렸을 때였다. 당시 인권활동가를 위한 ‘제주 다크 투어’가 기획 되었었다. 제주 4.3 사건이 재조명되면서,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박물관도 지어지고 사건현장들은 다크 투어의 코스가 되었다. 인권활동가들에게 산 교육의 현장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적극적이고 목소리가 커서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이번 제주 예멘 난민 관련 취재에 있어서 주요 길 안내자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앞서 있었던 취재들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뻔 했다. 다행히 그를 만난 것은 때마침 내려간 제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지역 간담회 자리였다. 나의 취재 기획을 들은 제주여성민우회 대표님이 연결시켜준 것이다. 이후 8월의 여름날 본격적인 취재가 가능했다.

청년시절 신학을 공부했던 그가 진보적인 카톨릭 청년단체인 ‘우리신학연구소’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교회 쇄신과 사회 쇄신을 꿈꾸었던 그가 필리핀에서 공부를 하고 오고, 이후 평화와 인권관련 활동을 이어오다가 독립해서 제주평화인권연구소 ‘왓’을 만들기까지의 여정은 그를 인권전문가로 만드는 과정들이었다. 제2공항 문제나, 강정 해군기지 문제로 제주사람들의 관심이 쏠려 있을 때, 그는 인권의 제도화 문제를 고민했다. 그러던 와중에 제주 예멘난민 문제가 터졌고, 긴급하게 대응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활동가들과 엮이면서 언론을 대응하는 담론 싸움의 주자가 되었다. 그 이후로 제주의 목소리라는 미디어 매체에 그의 칼럼이 꾸준히 실리고 있고, 인권관련 이슈를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그래서 그가 차별금지법제정 운동에 연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그는 제주 예멘 난민 문제가 차별금지법제정 운동에 들어 온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으나, 한국사회의 인종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차별금지법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주민 관련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인권운동차원 보다는 연민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친하게 지내던 필리핀 이주민들의 상황을 알게 되면서, 여러 이주민들의 문제를 옆에서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저런 활동을 하게 되었고, 욕도 먹었다. 하지만 그 연민이 바뀌었는데, 국가인권위원회 인권 강사를 하면서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오히려 몰랐던 것을 깨닫고 인권전문가로 성장했다고 한다. 시작은 연민이었지만 현재는 한국사회를 상대로 싸우는 투사가 되었다. 대부분의 활동가가 그렇듯 활동비가 부족한 그는 가족들과도 살기 위해서 귤 농사를 짓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아살람 레스토랑에서 만났을 때 내민 무농약 귤을 먹어보고 너무 맛있어서 집으로 돌아와서 두 상자나 주문했다. 건강한 먹거리를 위해 노력하는 그가, 사람도 건강한 관계 맺음으로 공존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안다. 제주도에 그가 있어서 다행이다.

글 | 정혜실 (이주민방송MW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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